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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영화리뷰/ 문익환 목사/ 1987 영화 역사적 배경 본문

비움과 채움, 그리고 배움

1987 영화리뷰/ 문익환 목사/ 1987 영화 역사적 배경

미라클벤티 2018. 1. 28. 16:30

 

제 주변에 왠 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관람했다는 그 영화 『1987』 을 저는 이제야 관람했습니다. 대학 다닐 때 투쟁이 무엇을 뜻하는 지도 모른 채 운동권 동아리에 가입했었습니다. 물론,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지 만요. 친구 따라 강남간 격으로 운동권 동아리에 가입해 이 영화에 나오는 배경 음악『그날이 오면』을 참 많이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그 노래가 그렇게 마음이 아프다는 걸 느끼지 못했는데 영화를 같이 들으니 정말 울컥하더군요. 그 노래가 이렇게 슬픈 감정이었나? 하며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노래의 가사가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걸 보면 무슨 가슴으로 부르기 보다는 음원이 좋아서 머리로 따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 다니는 시절만 해도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화 된 시기였습니다. 독재정치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한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였고, 국민들이 국가에 대해 목숨 걸고 투쟁하거나 싸울 만큼 국가가 크게 잘못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로 실감도 나지 않았고, 관심 부족으로 동아리 활동을 오랫동안 유지하기란 어려웠습니다. 이내 운동권 탈퇴 선언을 하며 학교 선배들의 드러나지 않는 눈총을 많이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어린 마음에 너무 틀에 박힌 개념에 저의 생각을 끼워 맞추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 제가 스무살 초반 때만 하더라도 '419민주화 운동'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그저 국가의 정책에 위반하는 불순분자(?) 들에 대해 국가의 강압적인 조치인 줄 알았습니다. 그만큼 제대로 가르쳐주는 이들도 없었거니와 가르쳐 주고 싶어도 진실을 아는 이가 별로 없었을 겁니다. 실질적인 광주 사태 피해자가 측근에 없는 이상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전부인 줄 알았고, 먹고살기 바쁜 탓에 역사가 잘못된 것인지 방송이 국민들을 속이는 것인지 조차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물론 대학시절 동아리 방에서 사진 자료로 목격했던 광주 사태의 기록은 어린 제 마음을 무참히 흔들어 놓았습니다. 너무 잔인하고 공포스럽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우리나라의 흑역사였죠. 왜 그렇게 희생이 됐는지 원인도 모른채 그냥 우리나라 할머니 할아버지 대에서 '일제시대'를 겪어 온 것이 역사이듯이, 광주 사태도 그런 과정의 일부인 줄 알았습니다. 물론, 동아리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흔하게 방영되는 5공화국 드라마 조차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만큼 아버지대에 일어난 사건을 '현상'으로만 볼 뿐 '역사'적인 면에서 접근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즘 초등학생 아이들이 '2002 서해교전'을 교과서에서 배운다지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은 '나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사람들은 그만큼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기 보다는 성적 올리기에만 신경 쓰도록 현 시대 교육방침이 그렇고 부모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 당시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이런 영화는 한편의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제가 열 번 설명하고 주입 시키느니 아이들의 손 붙잡고 '연평해전' 한편을 같이 상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테니까요. 그나마 지금은 인터넷에 금방 찾아볼 수 있는 자료라도 있지만 제가 대학 다닐 당시에는 이 정도로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차츰 세월이 흘러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며 학창시절 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며 살았습니다. 제 머릿속에 있는 잘못된 정보와 무관심속에 방치된 역사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만한 기회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광주사태에 대한 이야기는 서서히 잊혀져 갔고, 들어보기는 했고 대충은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몰랐습니다. 더구나 굳이 몰라도 사회생활 하는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심하게 세월을 흘려보냈습니다.

저는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남편이 영화를 좋아한 덕분에 결혼 이후 영화를 자주 보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영화 '택시'를 보게 되었죠. 제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관심 밖의 일이었던 광주 사태에 대해 다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편협했던 관점을 제대로 교정해준 계기가 된 것이 바로 '택시'라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사실을 직시할 때까지는 더 많은 자료와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제가 가지고 있던 오해 몇 가지를 깨트려 준 것은 틀림 없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하나의 사실로 접근하기 까지는 오른쪽에서도 살펴보고, 왼쪽에서도 살펴보고, 위에서, 아래에서, 앞에서, 뒤에서 사방팔방으로 접근해봐야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인 걸 까요? 저만 그런 것일까요? 사실 '택시'를 보며 웃기도 많이 웃고 눈물도 많이 쏟았지만 관람 후 복 받치는 감정은 기쁨과 슬픔이 아닌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고 내가 이렇게 평안하게 살고 있는 것 조차도 어느 하나 공짜가 없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영화 '암살', '박열', '덕혜옹주' 등 우리나라 역사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를 볼 때마다 복받치는 감정입니다. 그런 면에서 『1987』영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박종철', '이한열'에 대한 이름은 모르고 지냈습니다. 지금은 너무 당연시 되어 익숙해져 버린 일상이지만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민주주의는 거센 공권력 속에 파 묻히고 말았겠지요. 또한 우리의 역사 책에는 그들의 희생에 대해 '열사'라는 타이틀 대신 국가에 저항하는 '불순 세력'으로 설명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들의 죽음이 참으로 어이없이 끝나버리고 마는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희생을 기리고 마음의 빚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우선은 역사의 속으로 이미 사라져버린 그들의 이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희생 가치가 퇴색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우리나라의 뿌리는 제대로 알고 넘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저 수능 시험에 비중이 적다는 이유로 외면 당해야만 했던 '역사'에 대해 늦었지만 다시 한 번 관심 가져봅니다. 그리고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공부합니다. 

사실 『1987』 의 영화도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어디부터 정치권의 개입이고 어디까지 언론의 놀이인 지 스스로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언론 기자는 사실을 파헤치는 것이 과연 정의 구현을 위한 것일까 정치권의 개입이 있었던 것일까?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 역)은 빨갱이라 몰아세우는 '김정남(설경구 역)'에 대해 팩트로 접근한 것일까? 큰 그림을 그리며 그림 안에 조각을 맞추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한열 열사의 머리를 맞춘 체류탄은 경찰이 아닌 전경이 쏜 것으로 나오더군요. 글쎄.. 그 당시의 공권력을 생각한다면 경찰관이 쏜 것을 전경으로 뒤집어 씌운 것은 아닐런지. 박처장이 자신의 부하를 과실치사죄로 빼준다고 약속했던 것처럼 잠깐만 들어가 있으면 그만한 댓가를 준다는 거래는 없었을까. 그 뿐만 아니라 그 전경은 이한열 열사를 고의로 쏘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 당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총기류(?)에는 오발과 관련한 문제점은 없었을까.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죽은 결과가 나왔으니 '업무상과실치사죄'로 기소가 됐을 터인데 얼마나 복역을 했으며 그 뒤에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하나의 영화로 인해 많은 사색의 시간을 가진 것 같습니다. 물론, 영화라는 것이 '사실'이라는 소재 위에 '허구' 라는 양념을 쳐야 '재미있는 맛'이 나는 법이겠죠.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도 저의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도처에 흩어진 자료를 수집해보기도 했고, 1987년도의 국정 흐름에 대해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여러 방면의 관점을 열어두고 사실에 접근하되 자체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아는 혜안은 지녀야 하겠습니다. 한편, 민주주의 역사에 발자취만 남기고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한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에 대해서도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1987』 영화 관람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 정리해봤습니다. 역사 공부하는 셈 치고 쭉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뜨거웠 던 1987년

먼저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1987』 영화의 배경이 된 1987년도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부터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까지 민주주의의 발자취가 된 그들의 흔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①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발생 (출처 : 위키백과 발췌 편집)

박종철(朴1965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1986년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를 한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소 이후에도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서울대 인문대학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87년 1월13일 자정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한 연행이었다. 

그는 범인도 아닌 용의자도 아닌 참고인 '박종철'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박종철은 경찰들에 의해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다가 10시간 만에 죽었다(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애초 경찰은 지병으로 인한 쇼크사였다고 주장했으나 부검 결과 박종철은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질식사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축소해 넘기려는 전두환 독재 정권에 맞서 6월 항쟁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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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1987. 4. 13. 전두환 대통령 호헌조치 (출처 : 위키백과 발췌 편집)

1987년 4월 13일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다(413호헌조치). 1980년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대통령은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한 뒤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유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화려한 업적을 남겼으나, 내부적으로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여당(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며 개헌논의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러던 중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고문과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며 민주화 요구가 겉잡을 수 없이 거세졌다. 이 틈을 타 야당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413호헌조치'를 발표한다. 주요 내용은 여야가 헌법안에 합의하면 개헌할 용의가 있지만, 야당의 억지로 합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선제를 고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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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1987. 6. 10. 이한열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최루탄 피격 (출처 : 위키백과 발췌 편집)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재학 당시 동아리 '만화사랑'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반독재투쟁에 가담,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6월 9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기로 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은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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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1987. 6. 29. 노태우 629민주화 선언 발표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발췌 편집)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 대표위원이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경찰력이 마비되자 정부는 한 때 위수령(衛戍令:대통령령에 이한 육군부대의 나라 장악) 발동과 군 투입을 검토하였으나 온건론이 우세하여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며,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신군부(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친목 모임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12.12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아 대한민국 5공화국을 세운 군집단/ 박정희대통령의 5.16군사정변을 주도한 군부와 구분하기 위해 '신군부'라고 칭함)는 1988년에 개최될 올림픽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위수령이 발동될 징후를 알아차렸던 미국은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를 저지시켰으며, 야당과 신속히 타협하도록 촉구하였다. 따라서 6·29선언의 생성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이 일정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87. 7. 9.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 진행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 참여한 문익환 목사의 추도사는 국민들의 마음을 울린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1987』의 엔딩크레딧 부분에서 문익환 목사의 민주주의에 희생된 열사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절규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 자료화면과 함께 『그날이 오면』노래가 서서히 흘러나오며 관객들의 마지막 남은 눈물마저 쏟아내게 했다. 


그 외 눈여겨볼 인물


우리나라 사람들 성격이 급해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모두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저희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엔딩크레딧이 끝나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것은 영화를 만든 제작진들에 대해 실례를 범하는 것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1987』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도 제법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위에 설명해드린 문익환 목사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읊은 추도사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문익환 목사가 영화배우 문성근씨의 아버지 입니다. 아버지가 장례식에 참석해 추도했 던 상대를 소재로한 영화에 아들이 출연한 느낌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문익환 목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장준하씨와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었던 윤동주씨와 소학교 동창생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만주 북간도 명촌동 사람들은 항일 감정이 특출나서 '일본'을 '왈본'이라고 부를정도였다고 합니다. 윤동주가 숭실학교로 건너왔을 당시 일제가 신사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문익환과 함께 동맹퇴학을 감행합니다.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자퇴로써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윤동주와 육촌 지간인 가수 윤형주씨 또한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사상이 후손과 주변인들에게 예술의 혼을 불어넣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마지막으로 문익환 목사가 시인 윤동주를 그리며 쓴 시 '동주야'를 게재하며  『1987』 영화리뷰 마칩니다.


-문익환의 시-

동주야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 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 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그 앞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습작기 작품이 된단들 그게 어떻단 말이냐

넌 영원한 젊음으로 우리의 핏줄속에 살아 있으면 되는 거니까
예수보다 더 젊은 영원으로
동주야 난 결코 널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니...

-1987년 70세가 된 그의시 '동주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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